사랑의 할부, 영혼의 잔고를 묻다 '필코노미(Feelconomy)'

 

고백] 6개월 할부로 산 건 선물이 아니라, 당신의 웃음이었습니다

퇴근길의 지하철은 언제나 비릿한 사람 냄새와 피로가 눅눅하게 절여진 채 달립니다. 어깨 위에 내려앉은 삶의 무게가 천근만근이라 고개조차 들기 힘들던 어느 저녁이었죠. 구두 뒷굽은 닳아 있었고, 마음의 뒷굽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습니다.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들어선 동네 작은 슈퍼마켓. 그날따라 주인 아주머니는 "어여 와요!" 하며 유독 살갑게 인사를 건네시더군요. 그 목소리에 섞인 온기 때문이었을까요.

매대 한구석, 조명을 받아 유난히 반짝이던 빨간 얼굴들. 딸기였습니다. "안녕?" 하고 말을 걸어오듯 수줍게 고개를 내민 그 싱그러운 존재들 앞에서, 저는 그만 걸음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차가웠던 바깥 공기와 달리 가게 안은 달콤한 향기로 가득했고, 그 순간 매캐한 매연으로 가득했던 제 폐부 속으로 봄의 공기가 훅, 하고 들어오더군요. "아, 나 아직 이런 색깔에 설렐 수 있구나."

딸기 한 팩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그 짧은 찰나의 위로가 저를 울컥하게 했습니다. 사실은요, 제 마음이 그 딸기처럼 싱싱하게 살고 싶었나 봅니다. 시들어가는 일상 속에서 나 자신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줄 아주 작은 핑계가 필요했던 거죠.

하지만 그 설렘도 잠시, 제 머릿속은 금세 복잡한 계산기로 변했습니다. 딸기 한 팩의 가격과 이번 달 공과금, 그리고 오늘이 누구의 날인지를 떠올려야 했으니까요. 맞아요, 오늘은 아내의 생일입니다.

지갑은 얇고 통장 잔고는 야박하기만 한데, 달력 속의 숫자는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게 그날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변변한 선물 하나 사주지 못하고 지나가기엔 제 마음이 너무 가난해 보였습니다. 결국 저는 아내가 평소 갖고 싶어 하던 작은 가방 하나를 골랐습니다. 그리고 카드를 내밀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죠.

"6개월로... 해주세요."

점원의 무심한 손길 끝에 카드 결제기가 '삑-' 하고 비정한 소리를 내며 영수증을 뱉어냈습니다. 손바닥에 닿는 그 기계의 서늘한 감촉. 그것은 마치 제 현실을 일깨워주는 차가운 경고등 같았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슬픔이라기보다 조금 매캐한 안개 같은 거였어요. 6개월. 그건 제가 아내의 웃음을 사기 위해 저당 잡힌 제 미래의 조각들이었습니다.




가방을 숨긴 채 현관문을 열었을 때, 아내는 평소처럼 저를 맞았습니다. 식탁 위에 케이크와 선물, 그리고 아까 그 딸기를 놓았습니다. 선물을 확인한 아내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뭘 이런 걸 다..." 하며 말끝을 흐리며 미소 지었습니다. 그 미소 속에 섞인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찰나의 떨림.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제 마음을 짓누르던 6개월의 중압감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적 있나요? 나 하나 먹을 딸기 한 팩 앞에서는 천 원, 이천 원에 벌벌 떨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는 기꺼이 미래의 나를 빚내어 현재의 기쁨을 결제하는 그런 밤 말이에요. 남들이 보기엔 대책 없는 과소비일지 모르고, 경제 지표로는 '마이너스'일지 모르지만, 우리네 인생에는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감정의 잔고'라는 게 있잖아요.

우리는 이것을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필코노미(Feelconomy)'라고 부른다더군요. 감정에 따라 지갑을 여는 소비 트렌드라나요. 하지만 저는 오늘 그것을 '사랑의 증명'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우울을 씻어내기 위해 샀던 딸기 한 바구니와, 아내의 웃음을 위해 긁었던 6개월의 할부. 그것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우리가 이 팍팍한 세상을 버텨내기 위해 스스로에게 투여하는 가장 따뜻하고도 절박한 처방전입니다.

독자 여러분, 당신의 마음은 지금 몇 개월로 할부 중인가요? 혹시 다음 달 카드 고지서가 두려워 오늘 누려야 할 최소한의 설렘조차 외면하고 계시진 않나요? 가끔은 괜찮습니다. 그 눈물겨운 사치가, 그 무모한 할부가 사실은 당신의 영혼을 간신히 지탱해주고 있는 생명줄일지도 모르니까요.

고지서는 다음 달의 내가 어떻게든 처리하겠죠. 하지만 오늘 밤 우리 집에 감도는 이 딸기 향기와 아내의 낮은 웃음소리는 평생 제 마음속에 이자로 남아 저를 부자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그래요, "그래도 이 맛에 사는 거지"라고 다짐하며 저는 오늘도 웃어봅니다.

오늘 밤, 당신도 당신 자신에게 혹은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작은 '할부'를 선물해 보는 건 어떨까요? 그 영수증 뒷면에 적힌 당신의 진심이, 당신의 무채색 하루를 가장 붉은 딸기 빛으로 물들여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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